
필리핀(19%)과 일본(15%) 간 관세율 조정이 마무리됐음에도 불구하고, 오는 25일 예정됐던 '2+2 고위급 경제·통상 협의체' 회담이 미국 측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돌연 연기됐다. 이로 인해 미국 주도의 관세 협상은 새로운 불확실성 국면에 접어들었다.
미국은 회담 연기에 대해 공식적인 사유를 밝히지 않았으며, 국내외 외교·통상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번 조치가 단순한 일정 변경이 아닌 전략적 의도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사전 조율 없이 회담이 취소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향후 대응을 위해 미국 측과의 외교 채널을 가동 중”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통상 협상을 지렛대로 삼아 각국의 산업 구조와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일종의 패권 전략을 펼치고 있다고 진단한다. 워싱턴 소재 국제통상전략연구소(ISSI)의 리사 김 박사는 “미국은 자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을 위해 일부 국가엔 혜택을 주고, 일부 국가엔 압박을 가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며 “이번 연기 역시 협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전술적 조치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첫 대외 통상 시험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공약 당시 ‘산업주권 회복’과 ‘전략적 중립외교’를 핵심 기조로 내세웠으며, 이번 협상은 이러한 철학이 실제 외교 무대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가늠하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특히 미·중 간 경제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한국은 반도체, 전기차, 희토류 등 전략 산업을 중심으로 양국 사이에서 균형 있는 외교 전략이 요구되고 있다. 김태연 교수(서울경제대)는 “지금은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하되, 중국과의 실리 외교도 병행할 수 있는 정교한 전략이 필요하다”며 “무조건적인 편승도, 애매한 중립도 아닌 다층적 외교 접근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번 협상을 통해 한국도 일본처럼 '패키지딜(Package Deal)' 형태의 접근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이 자국 내 투자를 유도하거나 공급망 재편에 협조하는 국가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흐름 속에서, 단일 품목이나 산업군을 넘어서는 포괄적 합의가 요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업통상전략연구원 관계자는 “결국 한국도 단편적인 양보나 요구보다는, 반도체 투자, 인허가 협력, 방위산업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패키지를 제시해야 할 시점”이라며 “이는 단순한 관세 협상을 넘어선 외교적 안목과 전략적 준비가 필요함을 뜻한다”고 지적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관세 협상은 감정이 아닌 전략의 영역”이라며 “이재명 정부는 백년대계의 시각에서 국가 산업과 미래 경쟁력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협상에 임할 것”이라고 밝혔다.